6·4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 정치의 화두는 당연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서로 다른 가치나 이미지를 합쳐 새로운 가치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데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중앙 정치를 강타한 콜라보레이션의 진정한 의미는 국민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새로운 가치의 창조다.

하지만 지방 정치는 현실적으로 중앙 정치의 틀에 종속된 안개 정국으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의정부 정가 역시 넘쳐나는 후보들로 인해 이번 선거에선 과연 누가 공천을 받을 것인지, 누가 살아 남을 것인지, 새로운 인물로 누가 탄생할 것인지, 저마다의 사람을 점친다.

사마천은 ‘무릇 정치란 덕(德)을 행하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덕이란 사람을 위해 열 개의 눈으로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의 정치 현실은 2150년 전 한나라의 역관(歷官) 사마천이 목숨을 걸고 고민하던 사기의 교훈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태어나 고조선의 멸망을 지켜봤다. 사마천은 18년 동안 3000년 중국 역사를 52만6200자에 이르는 사기(史記) 130권을 저술했다.

사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200여명으로 등장인물은 4000명에 달한다. 사기는 당시 1300여개의 방대한 직업군을 서술했다.

오늘날 2150년 전 중국에서 태어난 사마천이라는 인물을 새삼 떠올리는 것은 그의 사기가 ‘역사는 모두 갈등과의 싸움으로 평가하고 사람을 갈등의 산물’로 그렸기 때문이다.

갈(葛·칡 갈) 등(藤·등나무 등), 칡나무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휘감고, 등나무는 시계 방향으로 휘감아 올라 둘 사이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자연계에도 갈등이 존재한다. 태풍은 반드시 필요하다. 태풍이 바닷물을 뒤집어야 산소가 바다 속에 스며든다.

물 속에 스며든 산소는 플랑크톤을 키운다. 이로 인해 다양한 해양 생태계가 유지된다. 비가 와야 땅이 굳는 것처럼 갈등도 때로는 생산적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사회적 갈등은 세계 2위로 치유 비용으로 200조원이 든다고 추정했다. 또한 천성산 도룡용, 제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등의 갈등으로 수조원의 비용이 소요된다고 내다봤다.

사마천은 37세 때 부친의 유언에 따라 한나라 역관으로 들어갔다. 그가 47세 때 친구인 이릉 장군이 북방의 흉노족 정벌을 위해 5천 군사를 끌고 8만의 흉노족와 맞서다 투항했다. 이로 인해 이릉 장군은 반역죄로 한나라에서 식솔들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사마천은 흉노의 포위 속에서 부득이하게 투항한 이릉 장군의 사형을 비판한 죄로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사기를 완성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죽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BC 99년인 48세의 나이에 속전(죄를 면하려고 바치는 돈) 50만 전을 내지 못해 치욕스런 궁형을 당한다.

사마천은 환관 신분으로 “그렇게 목숨이 아까우냐”는 사대부들의 조롱과 감옥 속에서도 사기를 저술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사마천은 “궁형 당한 처지에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식은 땀이 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드디어 BC 95년에 황제의 신임을 얻어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환관 중 최고직인 중서령에 올랐다.

사마천의 사기는 궁형을 당하기 전인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전반부에는 왕에 대한 아부가 섞여 있고 후반부에는 왕에 대한 비난의 역사가 기록됐다.

사마천은 궁형 이후 “역사는 무엇인가. 내가 왜 왕에게 아부해야 하나. 이젠 죽음도 두렵지 않다.

내가 법에 굴복해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소 아홉 마리의 털 가운데 하나를 뽑는 것과 같을 따름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이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다짐하고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사기를 완성한다.

사마천은 완성한 사기를 2부로 만들어 한 부는 시장에 내놓아 사람들이 사기를 필사케 했다. 또 다른 한 부는 자신만이 아는 동굴 속에 감춰 후세에 전해지도록 했다.

동굴 속에 감춰진 30센티 길이의 대나무를 엮어 만든 사기는 우연히 지난 2006년 발견돼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한편 1200년대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조차도 “사마천은 위대한 역사가다”라며 측백나무를 사마천의 무덤에 심어 그를 기렸다. 측백나무는 잎사귀의 겉과 속이 같아 선비의 상징으로 불린다.

조선 제일의 호학군주 정조 또한 1797년에 당대학자인 정약용 박제갑을 시켜 사기의 주요 인물들을 발췌한 사기영선(史記英選)을 펴내고 사회 통합에 활용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는 출신과 성분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한 군왕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도 초기에는 인재등용 정책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진나라 대신들이 타국 출신의 관료인 객경(客卿)들의 충성심을 의심해 축출(축객·逐客) 해야한다는 여론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때 진시황의 신하인 이사(李斯)가 열린 인사정책과 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상진황축객서’라는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태산불사토양(泰山不辭土壤)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 태산은 조그만 흙을 가리지 않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지 않는다.

춘추전국시대 한나라는 수공(水工)인 정국(鄭國)을 진나라에 보내 대규모 운하를 파게 했다. 진의 국력을 신장시키는 척하면서 과도한 비용을 소모케 해 진나라 국고를 축나도록 했다.

이같은 사실을 안 진나라 대신과 귀족들은 이를 계기로 타국인 관료인 객경(客卿)들을 배척하기 위해 왕에게 진언했다.

이들은 “제후국에서 와 자신의 나라를 위해 진의 군신(君臣)을 이간시킬 뿐이니 이 기회에 일체의 객경(客卿)들을 추방하심이 가한 줄로 아룁니다”라고 진시황에게 고했다.

이후 진나라가 이사(李斯) 자신까지 포함한 타국인들을 추방하려는 축객령(逐客令)이 선포되자 이사는 왕에게 타국인 배척의 부당성을 상소했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양보하지 않아 저렇게 커졌으며, 하해(河海)는 한 줄기의 물줄기라도 가리지 않아 저렇게 깊어진 것입니다. (是以太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그런데 지금 진에서는 백성을 버려서 적국을 이롭게 하고, 빈객을 물리쳐서 다른 제후국이 공업(功業)을 세우도록 하며 천하의 인사들을 쫓아내고 타국인을 못 들어오게 하니, 이는 도둑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양식을 공급하는 격입니다. 이러고서야 국가를 위태롭지 않게 하려 해도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사의 상소문을 읽은 진시황은 객경(客卿)들의 축객령을 철회하고 이사를 복직시키고 그의 정책을 채용하게 한다.

사마천은 군왕의 덕목으로 ‘청(聽)’을 강조하고 왕이 큰 귀와 열 개의 눈을 마음에 하나로 모아 신하들의 의견에 경청(敬聽)할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덕이 없이 오만한 자는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 한나라의 창업 삼걸(三傑)인 한신을 예로 들었다. 한신은 결국 자신의 꾀에 속아 토사구팽(兎死狗烹) 된다고 사기는 묘사한다.

한편 의정부시의회가 2012년 7월부터 10월말까지 새누리당과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 의장석을 놓고 당대 당의 대결인 자존심 싸움으로 넉 달간 파행했다.

의정부정가를 강타한 파행이 장기화하자 시민들과 시민단체는 민생을 외면한 의회의 처사에 연일 집중포화를 퍼부었고 의회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에 보다 못한 새누리당 빈미선 의원이 당론으로 정한 의장 후보를 무시하고 자신이 의장 후보로 나와 민주당의 지지를 받고 의장에 당선됐다.

이후 시의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반기 의장단 구성과 함께 의회가 정상화 됐다. 의회는 여성 특유의 모성 리더십을 통해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기약 없는 104일간의 파행을 풀었다.

하지만 빈 의장은 당 내의 묵시적 합의를 깬 책임에 스스로 탈당했다. 빈 의장은 무소속 의장으로 지난 2년간 갈등을 해결하며 조용한 메시지로 최선을 다해 활동해 왔다.

빈 의장은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현장을 누벼  공직자나 직원들 사이에도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지역구에서는 시민들이 복당 안 됀 빈 의장을 의아해 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새누리당 후보를 떨어뜨린 해당행위를 한 후보들을 모두 입당시킨 것은 균형 잃은 처사라는 목소리가 불거져 나오고 있다.

시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콜라보레이션의 시대정신을 부정하며 권위주의에 빠진 뺄셈의 정치가 아직도 통하기나 하는 건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순환한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처럼, 역사는 결코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만 다른 지점에 닺을 내릴 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보통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정치 과잉의 시대, “분열은 적국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이사(李斯)의 간청에 폭 넓은 인재 풀을 가동해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의 포용력이 새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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