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여성 등산객 살인사건이 6월 7일 의정부시 사패산 등산로 기슭에서 발생했다.

지난 5월 강남역 노래방 묻지마 살인사건부터 시작된 야만적 행위는 이제 도를 넘어 여성들을 향한 무차별 모방범죄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은 지난 5월 17일 밤 자정을 막 넘긴 시간에 발생했다. 이로 인해 꽃다운 스물셋 나이의 청춘이 져버렸다.

범인은 서른넷의 목사 지망생으로 밝혀졌다. 범인은 자백에서 “여자라서 찔렀다. 여자가 나를 무시해서, 여자가 싫었다. 그래서 여자를 죽였다”고 자백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타자로서 여성’이 왜곡된 모습으로 우리사회에 속살을 드러낸 순간이다.

피해자 하모 양과 목사 지망생인 김씨, 그리고 어처구니 없는 여성비하 살인동기, 어디서 많이 본, 잘 짜여진 시놉시스의 기시감마저 든다.

기자들은 일제히 강남역으로 몰려갔다. 편집이 불필요한 살인사건은 우리의 안방에 민낯으로 전달됐다. SNS를 통해 비보를 접한 수 많은 여성들이 강남역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되살아난 희생자의 넋에 빨간 입술을 지끈 깨물었다. 순식간에 수만 개의 노란 포스트잇이 바람에 너울댔다.

여성들의 추모에 이어 생경한 일베 소식이 강남역에서 퍼져나왔다. 사건은 여성혐오 혹은 남성혐오 방향으로 변질됐다. 플롯이 페미니즘으로 급반전 됐다.

이어 ‘채식주의자’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언론은 온통 귀에 생소한 ‘맨부커 인터내셔날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식을 전했다. 처음 우리는 서울 한강에 ‘채식 괴물’을 떠올렸다.

TV 속에 비친 젊은 여성작가 한강이 우리를 기쁘게 했다. 그 사이 강남역의 비극은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지나 싶었다.

하지만 5월 29일 새벽 5시경 수락산 등산로에서 60대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우리 모두 묻지마 살인이라 직감했다. 경찰은 또다시 CCTV로 범인을 쫓았다. 범인은 스스로 자수해 묻지마 살인이라고 자백했다.

연이어 20대 여교사가 자신이 근무하는 섬마을 초등학교의 학부모 2명 등 마을 주민 3명에게 한밤에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뒤늦게 알려졌다.

여교사는 다음날인 5월 22일 새벽 경찰에 신고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여교사가 가해자로 지목한 3명 중 2명의 DNA가 여교사의 체내에서 검출됐다.

매클루언(Marshall macluhan)의 말처럼 우리의 세계는 동시다발적성 세계다. ‘시간’은 멈추었고 ‘공간’은 사라졌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지구에서, 하나의 사건을 동시에 경험하는 지구촌에 살고 있다.

매스미디어와 SNS 등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의해 세상에 전달되는, 뭔가에 의해 일희일비(一喜一悲) 조종당한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단지 소비자에 불과한 세상에서 그 무언가가 사라져버렸다는 공허한 느낌이다. 이처럼 우리는 파생실재적 미디어 사회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은 미숙아로 태어나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한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표정을 읽고 모방한다. 뇌 속에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 있기 때문이다.

거울 뉴런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뇌세포이다. 이 때문에 아이는 성장하면서 타자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구조주의 철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본성은 증여(give)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자기희생과 같은 행동은 인간성의 잉여가 아니라 인간의 기원(origin)이다”라고 말한다.

드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타자’라는 용어는 사회 내에서 ‘주류’로 여겨지지 않는 여성 등 모든 사회적 약자 집단에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문명사회에서도 남성은 단지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우월감을 느낀다. 드 보부아르는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열등감으로 고민하는 남자에게 기적적인 약이 되고, 특히 자기의 사내다움에 불안을 느끼는 남자일수록 여자에게 오만하고 공격적이며 경멸적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우리사회에 여성혐오, 남성지배의 병리 징후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하게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언제까지 패권을 쥔 남성지배 이데올로기 폭력사회로 이어갈 것인가. 세상 속에 ‘타자로서의 여성’은 이제 평화롭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과거 여성인 엄마의 얼굴을 맞대고 표정을 읽고 모방하던 나의 ‘거울’ 속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성적 사회’와 ‘지혜롭고 따듯한 공동체’를 위해 ‘네오 페미니즘’의 세상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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